IBM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CTR (Computing- Tabulating- Recording Company) co. 를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IBM의 전신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독일계 미국인이며 통계학자였던 허먼 홀러리스(Herman Hollerith, 1860 ~ 1929)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에서 10년마다 진행하는 인구조사 사업에 민간사업자로 제안을 하게 됩니다.
<허먼 홀러리스(Herman Hollerith)>
3곳의 제안 경쟁 참여자 중 2곳은 조사에만 7년이 걸려야 했던 기존 수작업을 일부 변형한 방식을 제시한 반면 Herman은 주어진 카드 하나에 구멍을 뚫으면 남자, 뚫지 않으면 여자와 같은 방식으로 구분하는 장치를 제안하여 제안 경쟁에서 채택받게 됩니다. 그리고 Herman의 천공카드 시스템은 2년 만에 통계 결과를 낼 수 있는 획기적인 시스템이 되었으며 그 후, 테뷸레이터라는 기계를 만들어 금융과 철도를 비롯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대용량의 자료처리를 처리할 수 있게 회사를 발전시켰습니다.
<천공카드>
< Tabulating Machine>
이 기계의 이름을 따서 1896년 처음 설립했던 Tabulating Machine Company라는 회사는 이후 다른 2개의 회사와 합병되며 1914년 Computing-Tabulating-Rrecording Company(CTR co.)이 되었으며, 이 때 CTR 매니저로 채용되었던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에 의해 1924년 IBM이라는 회사로 태어나게 됩니다.
당시, 기계보다 진짜 돈벌이가 되었던 사업은 천공카드의 판매라고 합니다. 한번 구멍을 뚫으면 다시 쓸 수 없었던 일회성의 천공카드는 엄청난 양이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그에 따라 기계는 무료로 임대해 주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IBM은 대공항(1929) 중에도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고, 나치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Second World War, ) 속에서도 회사의 기능을 잃지 않고 전시에 탄도 계산이나 암호해독을 위한 장비를 개발하기도 하고 1933년에는 최초의 전동타자기를 개발하기도 합니다.
1944년 하드 대학 교수인 H. 에이켄과 IBM사가 공동으로 설계ㆍ제작한 세계 최초의 기계식 계산기 Mark I은, 4칙연산과 삼각법에 의한 함수계산 등을 수행할 수도 있게 됩니다. 하지만, 군사 목적을 시작으로 이후 개발된 에니악은 MARK1이 1초에 덧셈을 3번 진행하는데 비해 매초 5000번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미국 국방부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무어학교(Moore school)에 의뢰하면서 에니악에 연구가 시작됩니다. 무어학교는 1923년 Alfred Fitler Moore의 기부로 세워진 학교로, 컴퓨터 역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창이던 당시, 비밀리에 ‘프로젝트 PX’란 연구가 진행됐고 전쟁이 끝난 1946년에야 그 실체가 대외적으로 공개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에니악(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 ENIAC)의 개발 연도가 1946년이 되었습니다.
<ENIAC>
세계 최초의 진공관식 컴퓨터인 에니악은 펜실베니아 대학의 John Mauchly와 J. Presper Eckert에 의해 개발되었고, 최초의 컴퓨터 회사인 EMCC(초기 이름은 ECC)를 설립한 이들은 에니악의 차기 모델인 UNIVAC(Universal Automatic Computer)도 개발합니다.
UNIVAC은 펀치카드가 아닌 자기테이프로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새로운 혁신이였으며, 기계는 더욱 작아지고 속도는 보다 향상되었습니다. 자기테이프 저장 방식은 그 이전까지 2진수를 이용한 입출력을 넘어서 컴퓨터가 문자와 숫자를 2진법으로 변환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어셈블리 언어(Assembly Language)를 적용하였습니다.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의 시작이었습니다.
<UNIVAC>
이 후, 에니악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1949년 '존 폰 노이만'의 주장을 도입하여 캠브리지 대학의 연구팀이 프로그램 내장방식을 채택한 '에드삭(EDSAC)'을 만들게 됩니다. 이와 함께 2진수 체계를 이용한 '에드박(EDVAC)'이 만들어졌고 1951년에는 '유니박―원(UNIVAC―1)'을 만들어 상품화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UNIVAC을 만든 두 개발자는 IBM을 찾아갔지만, 당시 전자계산기 및 타자기에 있어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IBM은 독점법에 발목이 잡혀 UNIVAC을 구입할 수 없었고, 걀국 타자기와 펀치카드판독기, 면도기 생산업체였던 레밍턴랜드(Remington Rand, 1956년부터 스페리랜드,1979년부터 스페리,1986년부터 유니시스)가 UNIVAC의 판권을 가져가게 됩니다.
첫번째 유니박은 1951년 연방 통계청에 설치되었고 또 다른 설비가 여론조사기관인 A.C. 닐슨, 푸르덴셜 보험사 그리고 GE에 공급되었습니다. 1952년 텔레비전 방송사인 CBS는 선거 결과를 산출하는 데 유니박을 사용했으며, 대통령 후보 아이젠하워의 승리를 미리 점침으로써 유명해지며IBM 컴퓨터조차도 당시에는 'IBM 유니박'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한 때 컴퓨터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유니박은 미국의 중요한 컴퓨터로 남아 있었으며, 이는 IBM 경영진으로서는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조그만 중소기업에 지나지 않던 레밍턴랜드에 고전하던 IBM은 결국 UNIVAC보다 작고 유지비가 덜 드는 자기드럼방식의 IBM 650을 개발하는데 성공합니다. 최초로 대량생산된 컴퓨터인 IBM 650은 연구소와 기업 등에 속속 도입되게 되었으며, 영업망과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춘 IBM은 이후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며 업무용 컴퓨터의 1인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IBM 650>
IBM은 그 후 수십 년간 국가와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 덕택에 세계를 주도하는 컴퓨터 기업으로 부상했고, 이에 미국 정부는 수차례 독점법 위반으로 기업에 법적 조치를 취하려고 했지만 아무 성과도 거둘 수 없었습니다.
1950년에서 1960년대가 국가에서 기업으로 컴퓨터의 활용이 옮겨간 시기라면 1970년대는 기업에서 가정으로 컴퓨터의 활용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1974년 MITS(Micro Instrumentation and Telemetry Systtems)사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가정용 컴퓨터인 ‘앨테어 8800’을 만듭니다. 하지만, 적합한 운영체제가 없어서 출시를 보류하고 있던 MITS의 설립자 포레스트 밈즈에게 당시 하버드 재학생이었던 폴 앨런과 빌게이츠가 운영체제를 만들어 찾아옵니다. 이로써 앨테어가 앨테어 베이직(Altair Basic) 인터프리터로 날개를 단 동시에 당시 두 학생은 사이닝 보너스(signing bonus, 특별 보너스) 800달러와 한 대당 팔릴 때마다 라이선스 비용으로 30달러를 요구하며, 소프트웨어가 자본을 집적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들기 시작하여 차후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사의 토대를 만듭니다.
손으로 들 수 있는 박스 크기에 397달러의 저렴한 크기의 이 컴퓨터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쯤 또 다른 두명의 친구가 시대의 전환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입니다. 1976년 그들은 첫번째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내지만, 그 때까지 HP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워즈니악은 “사원이 발명한 것의 특허는 회사에 귀속된다"는 조항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힘들게 만든 컴퓨터가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될 상황에 처합니다. 고민하던 그들은 임원에게 컴퓨터를 보여주었고, HP의 임원은 그들의 작품을 보고는 코웃음 치며 일반인에게 컴퓨터가 필요할 이유가 없다며 그들의 아이디어를 발로 차 버려 회사에 귀속되지 않은 개인의 발명품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1977년 3월 16일, 미 서부해안 컴퓨터 전시회(West Coast Computer Faire)에서 둘은 이 새로운 컴퓨터를 공개했고 사람들은 환호하며 그들의 부스에 모여들어 애플(Apple)이라는 회사를 알리게 됩니다.
1981년 IBM도 결국 Personal Computer 시장에 진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이미 애플, 아타리(Atari), 코모도(Comodo) 같은 회사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뒤쳐진 시장을 잡기 위해 초조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스티브 잡스의 성공가도를 보며 초조해하고 있던 빌게이츠는 IBM을 찾아가 IBM이 PC 시장에 뛰어들면 충분히 애플을 이길 수 있음을 역설하며 자신이 IBM의 개인용 컴퓨터에 운영체제를 제공해 주겠다고 합니다. 단, 자신의 MS-DOS를 운영체제로 하는 대신에 컴퓨터가 팔릴 때마다 라이선스 비용을 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당시는 소프트웨어를 장당 판다는 개념이 없었던 때였고 보통은 납품을 해준 후에 일시불로 받는 것이 주류였기 때문에 IBM 측은 생소한 계약에 잠시 당황했지만, 컴퓨터가 팔리는 가격에 비하면 작은 가격이라 생각하여 계약 조건을 받아드립니다. 재미있던 사실은 당시 빌게이츠는 계약을 하면서 팔아넘기기로 한 물건 자체를 그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계약 이후 그는 프로그래머들을 수소문해 시애틀컴퓨터 사의 Q-DOS를 사들여 그것을 변형시킨 MS-DOS를 만들고 IBM에 정상 납품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운영체제를 제공하는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CPU를 납품해 주고 있던 인텔이라는 하도급 업체의 도움을 받아 IBM은 1위 탈환을 위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합니다.
토마스 왓슨
IBM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일 것입니다.
<토마스 J 왓슨 (Thomas John Watson, Sr.)>
토마스 왓슨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회사의 경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다 회사를 그만두고 각종 피아노 같은 악기를 판매하는 영업사원이 됩니다. 수중에 장사를 할 돈이 만들어지자 그는 정육점을 차려 장사를 시작하지만 친구에게 빌려준 거액의 돈을 떼이고 설상가상으로 가게마저 망하자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다시 자신의 적성을 살려서 사무기기 업체인 NCR의 영업사원으로 입사합니다. NCR에서 놀라운 영업실적을 기록하면서 승진을 거듭하던 왓슨은 승승장구합니다. 급기야 라이벌 업체들은 왓슨을 상대로 반독점 금지법을 어겼다면서 소송을 걸고 결국 왓슨은 5천달러의 벌금과 함께 1년의 징역형을 받으며 이 과정에서 왓슨이 다니는 회사 NCR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그 후, 지금의 전신인 CTR로 입사한 왓슨은 Think라는 슬로건을 통해 직원들에게 생각을 강조하였고 해외시장 개척이 큰 성공을 거두어서 1914년 400만달러의 매출은 1920년 1400만달러로 네배나 껑충 뛰었고 적자였던 CTR은 흑자로 반전하게 됩니다. 왓슨은 직원들에게 짙은 양복에 하얀셔츠 그리고 넥타이를 꼭 메도록 했는데 이는 고객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이는 고객만족 경영으로 이루어져서 CTR의 성공을 이루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컴퓨터의 시대를 맞이하여서 이제는 회사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955년부터는 토마스 왓슨의 아들인 톰 왓슨 주니어가 사장이 되어서 경영을 승계합니다.
<토마스 J 왓슨 주니어 (Thomas John Watson, Jr.)>
토마스 왓슨은 회사의 미래가 타자기나 천공카드 시스템 같은 사무기기에 있다고 봤지만 그의 아들 토마스 왓슨은 회사의 미래는 컴퓨터에 달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영권을 이어받은 톰 왓슨은 컴퓨터 관련 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하였습니다. 연 수입의 3분의 1을 컴퓨터 개발과 연구에 쏟아 부을 정도였으며 원자폭탄 개발비용보다 두배가 넘는 50억불을 들여서 최초의 메인 프레임 컴퓨터로 일컬어지는 SYSTEM/360의 개발을 1964년에 완료합니다. SYSTEM/360의 개발이후 IBM은 매년 30% 이상의 성장을 거듭하면서 1972년는 시가총액469억달러로 미국에서 가장 비싼 회사가 됩니다. IBM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컴퓨터가 너무 잘 팔려서였습니다. 컴퓨터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자 미국정부에서는 IBM에 반독점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 소송은 1969년부터 1982년까지 이어졌으며 친기업성향의 레이건 정부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무죄로 결론납니다. 하지만 장시간 이어진 반독점 소송으로 IBM에는 관료주의와 보신주의가 회사내에 뿌리박히게 됩니다. 경쟁업체를 조사하거나 시장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어떠한 전략도 반독점 소송에서 불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대회사를 험담하는 메모 하나라도 반독점 소송에 영향을 줄수 있는 관계로 IBM 내부에서는 경쟁회사에 대한 어떠한 코멘트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와 소송중인 상황에서 경쟁업체에 대한 분석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고객에게 특별히 잘해주는 것도 아닌데 IBM의 제품은 끊임없이 날개 돋힌듯 팔리게 됩니다. IBM은 불황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상최고의 이익금을 경신합니다.
IBM의 위기
이렇게 되자 어느덧 IBM내부의 작원들 사이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한다는 자만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법보다 IBM WAY 가 더 강력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IBM 직원들의 자신감은 오만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사실 IBM의 추락은 1990년에 들어서며 갑작스럽게 극적으로 일어났지만 회사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90년 690억 매출에 60억달러의 이익을 얻었던 IBM은 91년에는 640억달러의 매출에 28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92년에는 645억달러의 매출에 50억 6천만달러의 적자로 미국 기업 역사상 최고 적자금액을 경신하면서 IBM에 대한 위기론이 급부상합니다. 92년 연말이 되면서 세계의 언론은 IBM의 몰락을 주목하였습니다.
IBM의 화려했던 과거성적을 생각해보면 2년간의 연속적자는 회사로써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슬럼프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IBM의 적자가 구조적인 문제에서 발생했다는 점이었습니다. IBM은 컴퓨터에 대한 모든 것을 만들고 사실상 독점을 했던 회사였습니다. IBM 컴퓨터를 대체할 컴퓨터가 세상에 존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IBM으로부터 컴퓨터를 구입한 사람들은 제품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을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IBM이 그냥 철수해버리겠다고 말하면 회사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손님은 왕이고 항상 고객이란 대접 받기 마련인데 IBM에게는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회사에서 쓰는 대형 컴퓨터 즉 메인 프레임 시장에서 IBM은 유일한 공급자이자 절대자였고 고객은 IBM 컴퓨터를 하루라도 빨리 회사에 설치하기 위해서 IBM 직원을 상대로 로비를 펼쳐야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히타치와 같은 일본전자 업체들을 선두로 해서 IBM이 장악한 메인 프레임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더 이상 IBM은 유일한 메인 프레임급의 컴퓨터를 공급할 수 있는 사업자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업체의 약진은 IBM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데스크탑 컴퓨터의 약진도 눈에 띄었습니다. IBM은 소형컴퓨터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스크탑 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IBM이 장악했던 중대형컴퓨터 시장을 대체하여 갔습니다. 이는 뉴욕을 기반으로 한 IBM이라는 골리앗과 캘리포니아지역의 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들이 연합을 한 다윗간의 거대한 주도권싸움이었다. IBM은 거대했지만 공룡처럼 굼떴고 판단이 느렸습니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들은 IBM보다 영리했고 민첩했습니다. IBM이라는 거대조직에서는 의사 결정이 체질적으로 실리콘 밸리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은 어느덧 IBM의 각종 사업부를 따라잡고 있었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IBM은 컴퓨터 하드웨어와 부품들 그리고 운영체체에서부터 각종 응용소프트웨어 모두를 개발했고 그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원래 IBM은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독점적으로 사용했는데 유닉스와 같은 개방형 소프트웨어가 등극하면서 그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중대형컴퓨터에서 유닉스를 탑재한 썬마이크로 시스템즈와 휴렛패커드에게 밀리기 시작힙니다. 또한 썬마이크로 시스템즈와 휴렛팩커드는 워크 스테이션의 성능을 향상시켜서 IBM의 독무대였던 메인 프로임 시장에도 진출하면서 점유율을 향상시켰습니다. 컴퓨터의 저장장치 역시 IBM이 최초로 개발하였고 시장의 왕자였지만 대형 저장장치 시장에서는 EMC가 소형장치에서는 시게이트가 IBM을 따라잡았습니다. 네트워크의 개념 역시 미국 국방성의 지원을 받은 IBM이 만들어 놓았고 이에 대해서는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소프트웨어적인 표준 규격에서 TCP/IP에 뒤쳐졌고 하드웨어 장치에서는 시스코에게 주도권을 넘겼습니다. 대형컴퓨터를 위한 데이터 베이스 프로그램도 오라클에게 밀렸고 소형 컴퓨터를 위한 데이터 베이스도 로터스에게 시장을 내주었습니다. PC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소형컴퓨터 시장에 진출했던 IBM-PC사업부 마저도 델과 컴팩의 협공에 위태롭기 그지없었으며 적자행진을 거듭했습니다.
또한 IBM의 공유정신은 1990년대 중반까지 PC업계를 리드하였고 이로인해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소프트웨어나 OS기업들이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러자 1990년대 중반 이후 델컴퓨터, HP, 삼성 등과 경쟁하던 IBM PC는 점차 하드웨어 부분에서 밀리게 되자 하드웨어쪽은 수익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이 사업부분을 중국의 레노보(Renovo)란 회사에 매각 후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소프트웨어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모든 언론과 유명인사들은 IBM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애플의 컴퓨터 광고를 담당했던 스티브 헤이든(Steve Hayden)은 IBM이 총체적인 부실상태라고 진단했으며 오라클의 창업자 래리 앨리슨은 IBM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특히 컴퓨터 저널리스트로 유명한 찰스 퍼거슨(Charles H. Ferguson) 과 찰스 모리스( Charles R. Morris)가 쓴 컴퓨터 전쟁(Computer Wars)에서 IBM의 몰락은 한때 세계를 풍미했던 소련의 붕괴와 비슷하다고 하여서 많은 사람들의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루거스너의 IBM 살리기
IBM을 위기에서 구해낸건 루거스너였습니다. 당시 많은 CEO가 물망에 올랐지만,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굼뜬 공룡 기업을 맡고자 하는 CEO는 없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 또한 후보 중 한사람이었지만, 당시 승승장구하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를 버리고 'IBM'을 택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루거스너를 말할 때, '컴퓨터 칩과 감자 칩'도 구분 못하는 컴퓨터 문외한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루거스너는 IT 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IBM이 개인 컴퓨터 판매를 주저하기 전에 이미 개인용 컴퓨터를 사용했고, 모든 회사는 컴퓨터 기반의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루거스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 글 가장 아래의 '발췌'글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루 거스너 (Louis V. Gerstner)>
IBM은 더이상 컴퓨터 판매 회사가 아니다
루거스너는 기업구조조정과 주요 사업 집중(시스템 통합 및 서비스, 서버 시장)을 통해 IBM을 3년만에 회생시켜 놓습니다. 그리고 2003년 샘 팔미사노에게 바톤을 넘깁니다.
<샘 팔마시노>
'스마터 플래닛(Smarter Planet)'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IBM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해법과 같은 거대담론을 중심으로 기술개발 및 솔루션을 제공하기 사작하였으며, 이런 지식기반의 고수익 사업 전환으로 이익 창출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2013년 4분기 IBM의 순이익은 58억 3,000만달러이며, 전체 매출은 293억 달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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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의 개혁> - 발췌
결국 보다 못한 IBM 이사회의 짐 버크(Jim Burke)가 회장겸 CEO인 존 에이커스를 사임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짐버크는 미국의 대표적인 의약품회사인 존슨앤 존슨의 (Johnson & Johnson)의 CEO로 ibm의 사외이사로 활동중이었다. 1982년 정신병을 앓던 사람이 진통제인 타이래놀에 독극물을 넣어서 여덟명의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존슨앤 존슨은 큰 위기를 겪게 된다. 이때 짐버크는 미국에 있는 모든 타이래놀 제품을 회수하고 새로운 포장용기를 개발할때까지 시장에 제품을 팔지 않았다. 기존의 캡슐형태는 누군가 뜯어본 흔적이 남지 않지만 알약형태로 포장을 바꿈으로 누군가 포장을 열어보면 흔적이 바로 나타나게 하였다.
타이래놀은 1억달러의 손해를 봤지만 사람들은 짐버크회장의 용기있는 행동에 찬사를 보내었다. 타이래놀 사건으로 인해서 침몰직전 까지 갔던 존슨앤 존슨은 짐버크 회장의 뛰어난 윤리경역덕분에 예전보다 사람들의 더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비록 짐버크는 외부에서 초빙된 이사회멤버였지만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였던 만큼 그의 명성과 영향력이라면 존 에이커스를 사임시킬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1992년 12월 짐버크는 그의 명성을 발휘하여 몇몇 이사회 멤버들을 규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3년 1월 마침내 존 에이커스를 탄핵시키고 새로운 CEO를 임명하기 위한 인사위원회를 구성한다.
IBM의 차기 CEO로 가장 먼저 언급된 사람은 적자 투성이의 GE를 살려낸 경영의 천재 잭웰치였다. 잭웰치는 부임하자 GE의 CEO로 임명되자 마자 강력한 구조조정을 시행하였다. 그는 10만명이 넘는 인력을 정리해고 하였는데 자고 일어나면 회사의 건물은 그대로 인데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해서 중성자탄 잭이라는 별명까지 생길정도였다. 당시 인사위원회 사람들은 잭웰치가 시행했던 강력한 구조조정이 IBM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를 어떻해서든지 스카우트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잭웰치가 자신의 왕국인 GE를 떠날마음이 있을리가 없었다. IBM은 그래도 여전히 최고의 CEO를 영입하기 위해서 매우 이례적으로 미국의 양대 헤드헌팅 업체인 하이드릭 앤 스터러글(Heidrick and Struggle) 스페선 스튜어트(spencer struart)모두에 일을 주기까지 하였다.
IBM은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경쟁상대중의 하나였던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게이츠에게도 CEO를 제의했지만 퇴짜를 맞았고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맞수였던 애플의 존스컬리(John sculley)에게도 역시 거절당했다. 그 밖에 얼라이드 시그널의 CEO 래리보시디(Larry Bossydy) 모토로롤라(Mortorola) CEO 조지피셔 역시 IBM의 제안을 받았지만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IBM으로부터 CEO를 제안 받지 못한 미국의 경영자는 없을 것이라는 농담까지 하였다. 하지만 IBM의 암담한 미래 때문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루거스너가 IBM에 전격적으로 회장겸 CEO로 지명되면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루거스너 이야기> 출처 : 월간중앙
“名사육사는 重病든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
이종천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팀장 (jclee@joongang.co.kr)
식품회사 CEO였던 그가 ‘사망선고’를 받았던 세계최대의 컴퓨터 기업 IBM을 어떻게 살려냈을까.취임 9년만에 이루어낸 그의 신화적 경영스토리
“ 코끼리가 춤을 출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야?”
반어적 질문을 던진 사람은 IBM의 전 CEO 루이스 V. 거스너(Louis V. Gerstner·60)다. 1990년대초 난파 직전의 거함에 올라타 이를 제 궤도에 올려 놓고 9년 간의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친 선장의 자신감이 이 말에서 느껴진다. 이 말을 그대로 뒤집어 보면 ‘덩치가 큰 코끼리도 조율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춤을 출 수 있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스너는 좀 더 의미심장한 의미를 이 속에 담고 있다.
그가 처음 IBM에 입성했을 때 이 덩치만 크고 동작이 굼뜬 공룡은 영악하고 날렵한 하이에나들에게 이리 저리 뜯기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사망 직전이라는 진단과 함께 하이에나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몸집을 줄여야 한다는 처방을 내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처방이 나오기까지는 시대적 배경도 있었다. 당시 기업 경영의 핫 이슈는 집중(centralization)과 분산(decentralization)이었다.
대기업의 중앙집권적 구조가 결정 과정을 느리게 하기 때문에 고객의 요구에 재빠르게 부응할 수 없다. 그래서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대기업을 가능하면 작은 부분들로 나눠 특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분사 열풍이 몰아치던 때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IBM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길도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거스너가 입사했을 때 분사 계획은 상당히 구체적 수준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IBM을 쪼개는 것은 스스로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며 과감하게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분산이 아니라 집중이었다. 추진중이던 분사 계획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결정은 옳았다. 모든 사람들이 “이것이 경영의 큰 흐름이야”라고 할 때 그는 “이것이 아니다.
하이에나만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코끼리도 춤을 출 수 있다”며 반기를 들고 실제로 9년간 IBM을 이끌며 이를 증명해 보인 것이다. 탁월한 리더십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모두 ‘그렇다’고 할 때 그 속에서 허상을 가려내고 바른 길로 이끄는 사람. 우리는 거스너의 이야기에서 통찰력과 결단력을 겸비한 리더의 표상과 만나게 된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IBM은 그동안 필자에게는 미스터리 회사였다. 무기력한 공룡, 애써 사과나무를 키워 놓고는 정작 그 과실은 영악한 아이들에게 다 빼앗기는 우직한 거인. 마이크로소프트·오라클·선마이크로시스템스·시스코시스템스 등 미국의 굵직굵직한 IT 기업들의 성공 스토리를 좇아가다 보면 곳곳에서 IBM의 그런 모습들과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이런 의문이 생겼다. ‘왜 IBM은 죽 써서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일까.’
누가 코끼리는 춤출 수 없다고 했나
퍼스널 컴퓨터를 처음 만든 회사는 IBM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움직일 운영체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DOS를 채택했다. 세계 최고의 연구인력을 갖추고 있던 IBM이 왜 그랬을까. 이 결정이 산업사의 분수령이 됐지만 IBM으로서는 너무나 뼈아픈 실수라고 하겠다. 또 오라클을 세계 2위의 소프트웨어 회사로 만든 핵심 무기인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도 IBM 연구진이 만든 것이었다.
오라클의 CEO 래리 앨리슨과 그의 동료들은 IBM 잡지에 실린 논문을 보고 IBM 보다 한 발 앞서 그것을 상업화해낸 것이다. 또 독일의 소프트웨어 업체인 SAP가 출범 당시 표방한 기업 소프트웨어의 표준화도 알고 보면 IBM에서 태동한 아이디어다. 도대체 IBM 내부 시스템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최근 거스너가 퇴임후 IBM에서의 집권 9년을 결산한 ‘누가 코끼리는 춤을 출 수 없다고 하는가’(Who Says Elephants Can’t Dance?)라는 그의 저서에서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1990년대초 IBM의 위기는 심각했다. 언론과 월스트리트·실리콘밸리의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IBM에 대한 우울한 전망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컴퓨터 전쟁’(Computer Wars)의 저자들은 IBM이 컴퓨터산업의 거의 모든 분야에 손을 뻗치고 있으나 그들이 지배하던 영역이 계속 위축되고 있다고 분석했고, 월스트리트저널의 폴 캐롤(Paul Carroll)기자는 그의 책에서 컴퓨터산업에 대한 IBM의 지배력은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빌 게이츠는 한 술 더 떠 “IBM은 7년 내에 사업을 접어야 할 것”이라고 시한부 생명임을 선고했고,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IBM의 치욕을 미국의 패배로까지 확대 보도하고 있었다.
이럴 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거스너다. 당시로서는 그의 발탁은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RJR 나비스코라는 식품회사의 CEO가 첨단 기술회사의 CEO로 간다는 것은 보기에도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더욱이 그는 테크놀로지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CEO 제의를 받았을 때 고민하던 그의 모습이 그의 책에 나타난다.
‘첨단 기술회사를 경영할 능력이 과연 나에게 있는 것일까, 다 죽어가는 공룡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상황이 어려울수록 투지가 불타오르는 타고난 승부사였던 모양이다. 플로리다 해변에서의 오랜 숙고 끝에 IBM 회생이라는 과제에 도전하기로 한다.
그러나 IBM에 입성하는 첫날부터 그가 맞닥뜨린 상황들은 때로는 그를 당혹하게 하고 때로는 실망스럽게 하고 때로는 절망의 순간으로까지 몰아간다.
# CEO에 공식 취임 이틀 전, IBM 이사회 정기회의. 거스너는 이 자리에서 CEO로 선출된다. 그날 회의에서는 각 부서의 사업보고가 있었는데, 그 중 재무 파트에서 하드웨어의 순익이 감소하고 주력 상품인 메인프레임 시스템/360의 가격이 절반 이상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그날의 안건은 현금 확보를 위해 융자 확대와 또 다른 가격할인 계획을 승인하는 것이었다. 현금 상황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는 것이 거스너의 눈에도 보였다. 재정 부문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날 회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끝났다. 그것도 서로 덕담을 나누면서….
# 1993년 4월1일 취임 첫날. 거스너는 해외 지사장들의 회의에 참석했다. 긴 회의실 테이블에 정렬한 그들은 IBM의 해외 ‘영토’들을 책임진 영주들이다. 모두 백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바로 뒤쪽에 그들보다 젊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영주가 발표할 때 그들은 급하게 메모하거나 때로는 쪽지를 테이블로 건네기도 했다. 마치 의회 청문회를 보는 것 같았다.
“회의를 지켜보기만 하고 참여하지 않는 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거스너는 해외 판매 책임자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은 관리보좌역(Administrative Assistant)입니다.”
첫날부터 거스너는 IBM의 경직되고 비효율적인 인사 시스템과 맞닥뜨린 것이다. 사내에서 최고라고 뽑힌 수백 명의 인재들에게 부여된 일이 단지 지사장을 보좌하는 일이라니…. 거스너는 무엇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 전략회의는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었다. IBM 회의에는 전형이 있었다. 프로젝터가 꼭 등장하고 그래픽이 곁들여진 그럴듯한 프레젠테이션이 이어졌다. 기술적인 전문어와 약어 등 난해한 어휘들이 난무했다. 겉모양새는 그럴듯했지만 거스너를 실망시킨 것은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이 뛰어나고 열성적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정작 그들의 프레젠테이션에는 핵심이 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고객을 고려하거나 경쟁자와 비교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시장과 연결된 전략이 없었다. 또 다양한 주제들이 서로 따로 놀았다. 즉, 회사 전체를 관통하는 시각이 결핍돼 있었던 것이다. 거스너는 형식적이고 알맹이가 없는 회의에 지쳐버렸다. 그는 방을 빠져나오면서 절망했다.
지난해말 퇴임하기 직전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취임후 첫 한 달 동안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변한다.
박제된 중세 봉건왕국 IBM
“처음 IBM으로 갈 때 IBM의 문제는 전략과 실행(execution)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가 보니 문제는 더 심각했다. 그것은 리더가 어떤 방향을 정하고 ‘나를 따르라!’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한 후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IBM은 마치 봉건 영주들의 조직 같았다. IBM 사람들에게는 ‘내 기호와 맞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나는 토끼굴에라도 떨어진 것 같았다. 문제는 전략이 아니라 이들과 함께 어떻게 전략을 펼쳐나가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어려움들을 거스너는 어떻게 헤쳐나간 것일까. 그의 IBM 취임 9년의 성적은 놀랄 만하다. 취임하던 1993년 순익은 -81억달러였다.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1년의 실적은 무려 860억달러어치를 팔고 순익 77억달러를 올려 그 어느 회사보다 이익을 많이 내는 회사로 변모했다.<표 참조> 실리콘밸리의 알아주는 터프가이, 인텔사의 앤디 그로브 회장도 ‘포춘’지에서 “그는 IBM에서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거스너의 성적표 중 업계가 주목하고 앞다퉈 본받으려고 하는 것이 있다. IBM을 환골탈태시켜 하드웨어 중심의 회사에서 서비스 중심의 회사로 만든 그의 새로운 차원의 서비스 정책이다. 앤디 그로브 회장도 “지금 모든 컴퓨터회사들이 IBM을 닮자는 결정들을 내리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이 본받으려고 하는 전략은 컴퓨터산업의 아웃사이더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IBM 신드롬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HP의 여장부 CEO 칼리 피오리나가 컴팩을 흡수합병한 것도 IBM의 전략에 자극받은 것이다. 또 스토리지 업체인 EMC가 서비스 부문을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지난해말 여기에 저항하는 수석 엔지니어를 해고해 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엔지니어는 EMC 대표 제품의 핵심 아이디어를 짜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경제지들은 거스너의 전략을 빈번하게 조명해 왔으나 대부분 그 효과와 파장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컴퓨터산업의 문외한이 IBM을 환골탈태시키는 과정의 뒷이야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새로 태어나는만큼 얼마나 많은 진통이 있었을까. 이런 궁금증들을 그의 자서전은 속 시원히 풀어주고 있다. 그는 공룡 IBM에 어떻게 칼을 들이댄 것일까.
그가 들어갔을 때 IBM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것도 심장에서…. 수입의 90% 이상이 메임프레임 시스템/360과 여기에 따르는 소프트웨어에서 나왔다. 메인프레임의 운명이 바로 IBM의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 둘이 함께 가라앉고 있었다. 거스너는 메인프레임사업의 현황을 책임자에게 직접 듣기로 한다. 책임자는 역시 프로젝터를 켜고 보고를 시작했다. 그가 두번째 슬라이드를 들었을 때 거스너는 조용히 앞으로 나가 팀원들 앞에 앉으면서 프로젝터의 스위치를 꺼버렸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투박한 모습의 1993년 당시 IBM 본부 건물거스너는
IBM본부 건물까지 현재적모습으로 변모시켰다.
이날 거스너의 행동은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영어 사용을 못 하게 한 것만큼의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형식주의를 타파하자는 것을 직접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경쟁사들이 우리보다 30∼40% 싸게 팔기 때문에 판매가 급감하고 시장점유율이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메인프레임 팀의 보고에 거스너는 우리도 가격을 내리면 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한 푼이라도 아쉬운 때 수입과 순익이 크게 줄면 곤란하기 때문에 경쟁사만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IBM은 고객들이 시스템을 쉽게 바꾸지 못하리라는 것을 악용해 시스템/360에서 돈을 짜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거스너는 취임후 첫 90일 안에는 어떤 결정도 내리는 것을 피하라는 경영 그루들의 금언을 따를 수 없었다.
즉시 공격적인 가격인하 방안을 마련하라고 메인프레임 팀에 지시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전략이 지금까지 시스템/360이 채택해온 양극(bipolar) 기술 대신 혁신적인 CMOS 기술로 교체하기로 한 것이다. 이 같은 전환으로 메인프레임의 생산비용을 줄여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실 이 결정은 거스너로서는 추인한 것에 불과했다. 이미 그가 오기 몇 개월 전에 결정된 사항이었으나 실행이 안 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처럼 IBM 서랍 속에는 비전을 제시하는 파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IBM은 트렌드를 예측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변화를 이끈 기술들이 대부분 IBM에서 나왔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IBM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탁월하다는 인재들이 다 모여 있었는데도 말이다. 거스너가 보기에 IBM 사람들은 시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이디어가 곧바로 시장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그는 시스템/360의 오랜 성공에 안주하면서 위기의식에 둔감한 문화가 생겨났다고 진단했다.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 Corporation)은 20세기초 토머스 J. 왓슨 1세가 7∼8개의 작은 회사를 모아 만든 회사다. 처음에는 타이프라이터에서 치즈 자르는 기계까지 잡다하게 이것저것 다 만드는 회사였다. 그러나 초기 발명품인 펀치카드·도표작성 장치로 인해 컴퓨터의 개척자라는 영예를 얻는다. 그러나 IBM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그의 아들 왓슨 2세다. 1956년 아버지로부터 CEO 자리를 물려받은 그는 IBM을 과감하게 컴퓨터 시대로 이끈다. 그 핵심에 시스템/360이라는 메인프레임이 있었다.
우리가 지금 반도체 칩이라고 부르는 집적회로가 발명되자 왓슨 2세와 연구진은 그 장치의 중요성을 재빨리 읽어냈다. 초기의 컴퓨터는 수많은 진공관과 전깃줄로 얽히고 설킨 아주 커다랗고 흉측한 물건이었다. 또 진공관은 부피가 크고 열을 발생하므로 늘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 돌파구를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가 연 것이다.(‘월간중앙’ 2002년 11월호 ‘어느 IT 예언자의 추락’ 참조) IBM 연구진은 이 집적회로를 이용해 괴물같이 덩치만 큰 초기의 컴퓨터 대신 현대적 모습을 갖춘 더 강력하고 더 안정적이고 값도 싼 컴퓨터를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소프트웨어와 모든 주변장치는 시스템/360 계열의 컴퓨터라면 어디서든 통했다. 호환이 가능하다는 것은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됐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또 업그레이드도 용이했다. 고객에게 시스템/360은 ‘하느님이 내린 선물’이었다.
치즈 자르는 기계 생산회사에서 컴퓨터회사로
IBM은 당시의 기술 흐름을 재빨리 읽고 그것을 바로 시장과 연결해 고객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준 것이다. 시스템/360은 IBM을 완전히 새로 태어나게 했다. 이에 따르는 소프트웨어와 반도체 생산 라인과 전문 지식을 갖춘 판매 조직도 만들었다. 수십 년 간의 독주체제가 이어진다.
경쟁자의 위협이 거의 없고 시장지배력에 높은 마진이 보장되는 환경에서 IBM 사람들은 외부 현실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시장은 IBM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와도 그것을 제 때 제품화해야 할 절박감을 못 느꼈다. 거스너는 먼저 태평성대 시절의 좋지 않은 유산부터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사나운 경쟁자들이 도처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빌 게이츠·스티브 잡스·래리 앨리슨·스콧 맥닐리를 보라. 그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르는 탐욕스러운 포식자들이다. 그들이 기업을 운영하는 방식을 보면 두렵기까지 하다.
젊고 공격적이고 탄력이 있으며 일하는 데 밤낮이 없다. 또 그에 걸맞은 보상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게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IBM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거스너는 지금이 비상시국임을 선포하고 현실감각을 잃은 IBM 사람들의 투쟁심을 촉발시킨다.
“우리가 지금 고통받는 것은 그들이 시장에서 우리의 밥그릇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의 수입을 줄어들게 했으며, 우리의 자식들이 대학에 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이 싫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우리의 고통을 그들에게 넘기는 것이다.”
이어 거스너는 조직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뜯어고치는 리엔지니어링 작업에 착수한다. 잘 나가던 메인프레임 시절에 만들어진 시스템은 그동안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땜질하는 식으로 확장하다 보니 기형적인 시스템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CIO(Chief Information Officer)가 1명이지만 당시에는 이 타이틀을 갖고 있는 사람이 128명이나 되었다. 리엔지니어링 프로젝트로 무려 140억달러를 절감할 수 있었으며 하드웨어 개발 주기 등이 단축되는 소득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한 일 중 무엇보다 주목받은 것은 지금까지의 서비스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서비스 개념을 창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BM이 오랫동안 해온 사업 방식은 하나의 통합된 패키지를 파는 것이었다. 기업이 컴퓨터 시스템을 들여놓게 되면 모든 기본적인 것들이 같이 따라왔다. 모든 소프트웨어는 탑재돼 있고 서비스 비용은 컴퓨터 가격에 이미 반영돼 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패키지를 구성하는 것 중에서 데이터베이스나 스토리지 같이 한 분야만 특화한, 하이에나 같이 민첩하면서 사나운 새로운 피를 가진 신생 기업들이 무더기로 출현했다.
역량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는 그만큼 강점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IBM을 곤경에 빠뜨린 주범들이었다. 1990년대 초에는 기업 소프트웨어 시장은 수만 개의 회사들이 각축을 벌이는 치열한 격전장이 돼 있었다. 고객에게는 가격인하와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도 따라 왔으니, 이제는 고객이 이 모든 것을 통합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가령 데이터베이스는 오라클에서, 스토리지는 EMC에서 구입하면 이것들을 함께 돌아가게 하는 것은 고객의 몫이 된 것이다. 거스너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기업이 자체적으로 통합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객들의 새로운 욕구가 비등하고 있었다. 거스너는 바로 이 욕구를 읽은 것이다.
‘인적 자원과 기술력으로 볼 때 이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회사는 IBM이 유일하다.’ 거스너는 IBM의 최대 강점을 앞세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다. 그가 생각한 서비스는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다. 지금까지 IBM의 서비스는 IBM 제품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는 시스템 구축에서부터 컴퓨터 작동까지 고객의 IT 시스템 전체를 유지·관리해 주는 서비스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내에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회사의 뿌리부터 흔들어야 했다. 가령 이제부터 서비스 요원들은 고객에게 최상의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경쟁사의 제품까지 권유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IBM 제품과 마찬가지로 경쟁사들의 제품까지 유지·보수를 해 줘야 하는 것이다. 내부의 저항이 거셌다. 특히 자신들의 파이가 줄어들 것을 우려한 세일즈팀의 반발이 가장 컸다.
거스너는 1996년 서비스 부문을 떼어내 ‘IBM 글로벌 서비스’를 출범시키는 결단을 내린다. 거스너의 서비스 정책은 산업의 트렌드를 바꿔 놓았다. 1992년 IBM의 서비스 부문은 74억달러의 비즈니스였으나 2001년에는 300억달러로 커졌다. 지금 글로벌 서비스의 전사는 15만명을 자랑한다. 세계 최대 규모다. IBM의 e비즈니스 전략의 최전선도 이들이 맡고 있다.
거스너가 처음 IBM에 왔을 때 그는 절망 속에서도 자신과 닮은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점이 같았다. 둘은 때때로 하루 일이 끝나면 코냑과 시가를 같이했다. 거스너는 9년 동안 이끌어온 무거운 짐을 그에게 인계했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CEO 샘 팔미사노(Sam Palmisano·51)다.
팔미사노에게는 지금 거스너의 비전을 완성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거스너가 다진 토대 위에 성장의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는 일이다. 그 중 하나가 컴퓨팅 파워도 전기나 물처럼 쓰게 하자는 야심찬 계획이다. IBM이 PC를 만든 것처럼 다시 우리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몇 년 내에 판가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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